• [슈내/캐스딘] 리퀘 박스

    2023. 11. 19.

    by. 시두스

    키워드: 천사 캐스, 악마 딘, 원작 비틀기, 시즌 10 초반

    분량: 공백 포함 8138자

    리퀘 내용: 천사 캐스랑 디먼딘의 갈등과 마찰이요„„! 감사합니다!!


     

     

    온몸이 단단히 옭아 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에 고정된 수족갑을 찬 느낌. 이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먼지 한 톨 빼놓지 않고 건물 안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딘은 낡아빠진 폐창고 어딘가에 반드시 데빌 트랩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푸른 시선을 빼면,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말이다.

    딘은 자신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화가 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딘 따위는 그 고귀한 존재에 조그만 파장조차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처럼 반듯하게 서서, 미동도 없이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속은 타들어 가다 못해 잿더미가 되었을 테다. 그가 기억하는 카스티엘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자책 또한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멀쩡한 꼴이라니.

    악마는 천사를 비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정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하나 느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은, 천사를 눈앞에 둔 악마치고는 너무도 평온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악마라면 천사를 발견한 즉시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을 테지만, 딘 윈체스터는 제대로 된 악마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인간이었던 적도 없으니, 악마라고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둘이 대치한 창고 밖에서는 폭풍우가 내리고 있었다.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건물 안까지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을 테지만 천장에 겨우 매달린 전등이 흔들리면서 깜빡거렸다. 카스티엘과 딘 모두 암흑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다. 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그가 들고 있는 최초의 검이나 천사가 들고 있는 천사의 검이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참 낭만적이군 그래. 딘은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면 더 근사해지겠어.

    “이봐.”

    한참 동안 카스티엘의 시선이 빗겨나지 않자, 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요에 좀이 쑤셨다. 언제까지고 간만 보면서 시간을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카스티엘에게도 할 일이라는 게 있을 것이고 그도 할 일이 있었다. 이 구석까지 몰리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다른 천사의 날개를 뽑아서 부채를 만들었을 터였다. 아, 다른 천사들은 날개를 모조리 잃었던가? 캐스와 나를 엿같이 대하더니 꼴좋다. 딘은 비죽비죽 비웃음을 흘렸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천사는 그제야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꺾었다. 빌어먹게 익숙한 동작이었다. 카스티엘은 파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딘의 몸이 바짝 굳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수 있게 몸이 수그러졌다. 명백히 싸움을 대비하는 몸짓이었으나, 천사는 그런 움직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계속 발을 뗐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상처 입은 야생동물에게 다가가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의 보폭이 점점 커지다가, 어느덧 그는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그의 목적지는 딘이었다.

    기대감이 딘의 아랫배를 서서히 뜨듯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피, 비명,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이제는 그런 것들이 딘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가족 사업? 언제 적 얘기인지. 맥주와 치즈버거면 족했던 시절도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간이었을 적 기억은 전설 속 이야기처럼 드문드문 떠오르다 전부 떠오르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딘은 그렇게 스러져 가는 기억에 애상을 느껴야 할지, 홀가분함을 느껴야 할지 알지 못한 채로 천사를 주시했다. 적은 이미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하는 건데.”

    “…….”

    “말 못 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

    “거, 알아들을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군. 그리고 이제 그만 가까이 와줬으면 좋겠는데. 성스러운 냄새가 풀풀 나서 숨쉬기도 불편하거든.”

    그 말에 코앞까지 다가왔던 얼굴이 한 발짝 물러났다. 자신도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줄 몰랐다는 표정을 하고, 천사는 악마를 쳐다보았다. 멀리서는 2m를 훌쩍 넘어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히려 저보다 작았다. 그렇게 작지는 않지만 아래로 볼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천국의 군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주제에 꼭 삶에 찌든 회사원 같은 몰골이었다.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들고 있는 것이 한계 같은 모습. 그나마 남은 기억 속 캐스는 뭔가 대단하고 강했는데 이 꼴은 대체 뭔가. 그 안에 힘이 숨겨져 있다느니 하는 진부한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다. 딘은 허, 코웃음을 치고 팔짱을 꼈다.

    “그 칼은 폼으로 들고 있는 건 아니겠지?”

    “폼?”

    “제대로 쓸 수 있긴 하냐는 말이야. 난 지옥의 왕이라는 누구 씨완 다르게 약해빠진 천사를 잡아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취미가 없거든.”

    “그렇단 말이지.”

    “그래. 이래 봬도 레이디 퍼스트도 아는 신사란 말씀이지.”

    딘은 자랑스레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눈에 어둠이 들어차면서 흰자가 없어지고 오로지 새까만 칠흑으로 뒤덮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시야가 어두워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점이라 봐야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고통, 질병, 어둠, 그 밖의 갖가지 불행이 형광펜으로 표시한 것처럼 떠오르는 정도다. 당연하게도 천사의 고통 같은 건 악마의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카스티엘이 얼굴을 망가뜨리는 모습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새까만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어떤 강력한 힘이 명치를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사의 얼굴이 볼썽사나워진다. 그 모습에, 악마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아렸다. 하도 오래전에 느꼈던 탓에 그게 무엇 때문인지 깨닫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죄책감을 느끼는 악마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다. 크라울리가 안다면 또 귀가 떨어져 나가라고 한 소리 하겠지. 딘은 그도 모르게 이를 으득 갈았다.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죄책감이 느닷없이 분노로 변했는진 모르겠지만―잔소리를 해대는 크라울리 때문인가?―, 잘된 일이다. 천사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카스티엘은 그를 잡기 위해 벌써 몇 개월째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애꿎은 악마들을 죽여대지 않았는가. 그는 칼을 더욱 굳게 다잡았다. 여기서 카스티엘을 쓰러뜨리면 임무와 복수에 더불어 혼란스러운 감정까지 모두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넌 변함이 없군.”

    칼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을 유심히 살피던 천사는 무언가 새삼스러운 발견을 했다는 것처럼 미소를 띠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상태에서 입꼬리를 살짝 밀어 올려서 오히려 인상이 더 험악해졌으니까. 딘은 제가 무엇을 보고 그 표정을 ‘미소’로 받아들였는지 의아했다. 그는 정신 조종 같은 개수작에 걸려들 만큼 나약하지도 않거니와 눈앞의 천사가 그런 잡기를 쓸 것 같지도 않았다. 혹여 쓴다고 해도 일개 세라핌이 지옥의 기사에게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걸 수 있단 말인가.

    “딘, 나는 더 이상 네가 고통받지 않길 바란다.”

    딘이 의아함에 빠진 사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천사가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허, 하고 코웃음이 새어나간다.

    “하. 고통. 글쎄, 내가 그걸 느끼려면 지금쯤 댁이 날 그 은빛 칼로 날 찌르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아니. 내가 말하는 고통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반드시 피를 보아야만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글쎄. 난 네가 내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그는 전력을 다해 빈정대었지만, 상대방은 이미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천사의 얼굴 위로 떠오른, 마치 그의 속내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은 딘으로 하여금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저 잘난 얼굴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파괴욕과 악마가 된 이래로 느끼지 못한 안심, 안정감 따위가 상충했다.

    대관절, 고통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는 고통을 알지 못한다. 크라울리는 악마란 고통을 주는 존재지, 고통에 대해 아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크라울리가 하는 말이니 백 퍼센트 맞을 리는 없지만, 딘도 악마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 자신이 고통은 고사하고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밋밋한 시간을 보낸 지도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 그가 아는 감정이라고는 천진한 영혼을 희롱하고 고문할 때 흘러나오는 추임새 같은 것이었다. 딘은 감정, 고통 따위와 그 자신을 도무지 연결할 수 없었다.

    “아니. 정말로 모르겠거든.”

    딘은 침착한 표정 뒤로 당황을 구겨 넣고, 그가 하는 소리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억지로 띄워 보였다. 천사가 하는 말이 제게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보여주고, 또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그는 반쯤은 사실인 거짓을 내뱉었다. 감흥이 생기지조차 않는다는 투였다.

    “그렇군. 그래. 잘 알겠다.”

    천사는 그런 딘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딘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캐스의 손에 들린 칼날이 번뜩인다. 광원이 없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번뜩이다니, 스스로 빛을 내기라도 하는 건가? 딘은 홀린 듯이 카스티엘의 검을 바라보았다. 모양새 좋은 손에 자리 잡은 검은 차라리 짐승의 어금니라고 불려야 마땅했다. 그는 언젠가 깎아지르는 절벽 위에서 절벽을 향해 몰아닥치는 파도를 구경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도 가까이 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부수겠다는 악의가 그를 사로잡았으나, 검이 뿜는 기세에는 댈 바가 아니었다.

    천사와 그의 검은 그저 아름다웠다.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딘 윈체스터라는 악마가 도달하리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할 강함이 아름다움으로 화해 있는 것 같았다.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딘이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구둣발 소리 때문이었다. 콘크리트를 무심하게 밟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도 귀를 아프게 했다. 악마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들었다. 천사가 다시 그를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한 발짝 물러난 거리가 도로 줄어들고 또 줄어들었다.

    발걸음은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야 멈추었다. 딘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지금 제 손으로 꽉 쥐고 있는 최초의 검을 푹 박아버리면 이 모든 장난이 끝날 테다. 천사가 바닥으로 쓰러져서 더는 파란 눈을 끔뻑일 일도, 희미하게 웃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딘 윈체스터는 강력한 세라핌 하나를 죽였다는 명예를 얻게 되겠지. 다 좋았다. 그런데 도통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꽁꽁 묶인 것 같은 구속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딘이 옴짝달싹 못 하는 틈을 타고 천사가 손을 뻗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빠르게 무감각해지는 몸에서 이유 모를 안도감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이제 죽나 보다. 딘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으니 인간이었을 때의 버릇이 자꾸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래서야 인간의 피를 주입받아 구원받을 뻔했던―딘은 이 표현이 늘 웃긴다고 생각했다―크라울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뒤엎고 천천히 뻗어진 손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소중한 것을 만지기라도 하듯이, 악마의 머리카락과 뺨, 턱 따위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마치 깃털처럼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움, 따듯함, 간지럼 등이 느껴졌다. 딘은 눈을 감고 손길에 집중했다. 그 행동을 칭찬하고 응원하기로 하듯,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내 말을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딘. 잘 알고 있겠지만, 난 언제나 널 지켜보겠다.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불러라. 내게 기도해라. 가능한 한 빨리 네 곁에 도착할 터이니 말이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성스러움과 올바름이 뿜어져 나왔다. 딘이 지옥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을지도 몰랐다. 딘은 괜히 소름이 돋는 피부를 무시하면서 눈을 떴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천사가 있었다. 파란 눈이 찢어지고 뒤틀려 거멓게 타버린 영혼을 직시했다.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고 본능이 일렀다. 하지만 악마가 천사를 피해야 한다는 것만큼 당연한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본능은 때때로 그렇게 멍청할 때가 있었다.

    딘은 본능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무시하면서 혀를 핥았다. 우습게도 천사의 눈길은 침이 묻어 조금 번들거리는 입술을 향했다. 이런 점은 너도 변하지 않네. 그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 널 믿지?”

    “나는 카스티엘, 주님의 천사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말투 참 고상하네. 셰익스피어랑 단짝이라도 맺으셨나?”

    “난 그보다 더 오래된 존재다, 딘.”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경고하듯 으르렁거리다가 중간에 가서는 애달파지더니, 이젠 장난스러우시겠다? 딘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천사의 목소리가 바뀌는 톤을 따라가느라 머리가 다 아팠다. 카멜레온보다도 색이 바뀌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면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날을 기다리겠다, 딘.”

    준비해 온 말을 전부 털어놓았는지, 홀가분한 표정을 한 천사는 미련 없이 딘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멀어지는 몸과는 반대로 눈길에는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딘은 제 안에서도 피어오르는 한 쌍의 미련과 그리움을 억지로 삼켰다. 그 덕에 한 가지만 하라는 비꼼이 목구멍에 걸려서 끝내 뱉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무게를 남겼다.

    “안녕, 딘.”

    정말 마지막 말을 남긴 천사는 날갯짓 소리를 냈다. 돌연히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딘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다시 공기가 잠잠해진 후에야 팔을 떼며 씨발, 하고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별 기대없이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매서운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간 창고에는 혼자뿐이었다. 천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낮고 깊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데도 말이다. 악마는 눈을 까맣게 만들었던 어둠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악마 사이에서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드물었다. 딘은 결코 사회성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곤 죽음, 고문, 피, 임무가 다인 그는 이름보다도 ‘일 중독자’나 ‘걸어 다니는 살육 기계’ 같은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었고, 웬만한 천사들도 그를 별명으로 불렀다. 그 별명이 이제 딘이라는 이름보다 그를 더 정확히 나타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카스티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둘 사이가 끈끈하기라도 한 것처럼 따듯하게.

    딘은 콘크리트 바닥을 나뒹구는 최초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들 때마다 욱신거렸던 오른팔이 이번만큼은 잠잠했다. 그는 벌겋게 번득이는 낙인을 내려다보다가, 칼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어딘가에 꽂혀 있기만 하다면 그게 어디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딘은 건물에 남은 그와 천사의 흔적을 전부 없애고서야 창고를 나섰다. 거세게 몰아닥치던 폭풍은 이미 지나갔는지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진한 남색 밤하늘에 소금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딘은 달빛을 받으면서 발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에게 정해진 거처는 없었고, 임팔라는 벙커의 주차장에 인간 딘 윈체스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인간 딘을 기다리는 샘과 카스티엘과 함께.

    그러나 어떻게 그가 다시 벙커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딘은 악마였다.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그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샘과 카스티엘이 오만 애를 다 써본들 결국 다시 속이 시꺼먼 악마로 되돌아갈 것이다. 크라울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아내를 잃은 카인은 슬픔을 방패 삼아 최초의 검이 거는 유혹을 이겨냈다. 애초에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분노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딘은 다르다. 그는 이 세상에 분노가 아주 많았다. 거기에다 카인을 인간으로 남기 위해 사용했던 슬픔을, 딘은 전부 분노를 위한 땔감으로 사용하질 않는가. 루시퍼는 처음부터 카인이 아니라 딘 윈체스터 같은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야 했다!

    그는 천사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끝없는 증오 뒤에서,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살아있던 무언가가 다시 깨어나 새까만 타르같이 질척이는 감정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과거의 인연을 만났다고 이렇게까지 흔들릴 일이야 있나. 악마는 허, 코웃음을 쳤다. 문득 훌쩍이는 지옥의 왕과 전국의 바를 돌며 징징거림을 들어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와 다른 점은 파트너가 지옥의 왕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인간 딘 윈체스터라는 것뿐이다.

    지옥의 기사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인간성을 완전히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다시 마주친다면 조금 전에 마주한 천사까지도. 그 의견에 찬성하기라도 하듯 최초의 검이 윙윙거렸다.

    “착하기도 하지. 너도 기대되지, 응?”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는 것처럼 바지 허리춤을 툭툭 친 악마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킥킥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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