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터후/닥터로즈] 편지

    2024. 10. 19.

    by. 시두스

    키워드: 재생성, 로즈 시점, 편지 형식,  에클닥, 닥터후 뉴 시즌 1 피날레 기반

    분량: 공백포함 약 9,400자

    2015년 닥터후 온리전에 발행된 닥터로즈 트리플지에 실린 원고입니다. 원고 파일이 날아가고 실물 책만 있어서 온라인에 백업할 겸 타이핑해서 올려봅니다. 거진 10년 전 글이라 쓴 기억이 없어서 정말 남이 쓴 글 같네요 :0...

    회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이 글을 읽으실지 모르겠으나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타이핑하면서 틀린 맞춤법을 바로잡고 문맥에 어울리도록 일부 표현을 수정하는 등 편집을 거쳐 실물 책과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이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모쪼록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닥터! 닥터!

    대체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 멋대로 행동한 건가요? 그렇게 가고 나면 누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고마워할 줄 알았나요? 천만의 말씀. 내 안에서 치미는 슬픔에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이미 무너졌는지도 몰라요. 다시는 고쳐질 수 없을 것처럼 산산조각 난 기분이 드는걸요. 그렇게 부서진 가슴에는 엄청난 상실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허무, 이 공허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겠지요.

    지금 나는 혼자 울고 있답니다. 울고, 또 울고, 눈물이 그치면 다시 웁니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없게 된 사람처럼 울어요. 딱히 물을 마시지도 않는데 눈물샘이 마르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군요. 닥터도 신기해했겠지요. 그러고는 인간은 물 없이 

    닥터가 아직 내 곁에 있었다면 이쯤 해서 물었을 겁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요. 물론 우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하겠지요.

    글쎄요. 정신을 차려보니 타디스 어딘가를 굴러다니던 종이와 펜을 찾아내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21세기에 지구에서 사는 영국인이라면 지금 내가 하는 행위를 편지 쓰기라고 할 거예요. 혹시 그 영국인이 나 아니냐고요? 맞아요. 절대 이걸 읽을 수 없는 닥터에게 미움과 걱정을 가득 담아서 쓰다 보니 이 글이 편지가 아닐 수 없겠더라고요.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면 그게 편지가 아니고 또 뭐겠어요?

    게다가 혹시 알아요? 닥터가 이 편지를 받는 작은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먼 미래에서 싸우고 있을 당신에게 이렇게나마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싶어서 글을 적습니다. 넓고 복잡하고 반드시 선형적이지는 않은 이 우주에서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걸 가르쳐 준 건 닥터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든가 그럴 일이 일어날 리 있냐든가 하는 불만이 있다면 돌아와서 직접 하세요. 일언반구도 없이 나를 타디스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낸 닥터가 밉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당신을 영영 못 보는 것보다는… ….

    하.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네요. 마지막 메시지를 그렇게 남기는 게 어디 있어요. 그게 정말 마지막일 줄 알고 녹화한 거였으면, 너와 함께 해서 즐거웠다든가, 이런 건 별일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든가, 뭐 그런, 희망적인 말을 해도 좋았던 거잖아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아, 잠시만요. 도저히 더 쓸 수가 없군요.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자꾸 번지네요. 아직 할 말 안 끝났으니까 기다려요. 이 눈물을 마지막으로 울음이 멈췄으면 좋겠는데.

    진정하고 올게요.


    2000년대의 어느 날. 날씨 맑음. 기분은 나쁨.

    안녕, 닥터. 오랜만이에요.

    사실은 오랜만이 아닙니다. 나를 태운 타디스가 집에 도착한 지 이제 고작 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니까요. 그동안 나는 울음을 멈추고 엄마를 안심시킨 뒤 홍차를 진하게 우려서 방에 틀어박혔어요. 작심하고 편지를 쓸 요량으로요. 그래서 미키가 문을 두드리는 것도 무시하고 있어요.

    참 이상해요. 나는 지금 당신 없이 수억 년이 흐른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지구는 내가 떠났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어요. 탁상시계가 말하는 시간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닥터가 나를 배려한다고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요. 나는 당신이 나를 '배려'해서 나를 속였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슴은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나를 배려했다고 할 수 있나요? 내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당신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나도 이게 멍청한 생각이라는 건 알아요. 멍청하고 어리석고 어른답지 못한 생각이겠죠. 현명하게 군다면 나는 당신을 미워하긴커녕 응당 고마움을 느껴야 할 거예요. 어찌 되었든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우주와 미래를 본 유일한 지구인으로서 홀로 살아가느니 당신과 함께 죽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내가 죽는다면,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엄마가 슬퍼하고 미키가 눈물을 흘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서 떠나면 안 됐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죠. 마음껏 하세요. 하지만 닥터는 내게 그렇게 소중했어요. 그날 하루에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잠에서 깨어 일하러 갔다가 근무가 끝나면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포장해 온 피시앤칩스로 저녁을 때우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 이게 얼마나 한심하게 인생을 사는 방식인지 일깨워줬기 때문에, 나는 닥터를 더욱 보낼 수 없는 건지도 몰라요.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것과 다른 방식, 신나고 재밌는 삶의 방식을 알려준 당신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바보 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죠. 인간은 소중한 것을 앞에 두고는 바보 같아지고 마는 어리석은 생명체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펜과 종이를 붙잡고 편지를 쓰며 나만의 방식으로 바보스러움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눈물 때문에 종이가 얼마나 울든, 잉크가 얼마나 번지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요. 내심 당신이 이 추한 편지를 읽을 일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흥미로워할 사실을 적으려고 합니다. 이제 눈물이 좀 그치고 감정이 진정된 것 같으니까요.

    내가 밖보다 안이 훨씬 크고 정말 파랗고 사랑스럽지만, 조종사가 손을 놓아버려서 나와 같이 ‘버려진’(강한 표현이지만 이해하세요. 이건 다 나와 타디스를 살리겠다고 혼자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 닥터 때문이니까) 시공간을 여행하는 우주선과 지구에 도착했을 때,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하겠죠? 닥터의 유언 말처럼 닥터에 대한 건 전부 잊어버리고 엄마와 미키, 셋이서 행복한 가족을 꾸렸을 것 같나요?

    아니요.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조종간을 마구 휘둘렀어요. 물론 비명도 엄청나게 질렀고요. 다시 닥터에게 가려고 나는 갖은 애를 다 썼죠. 하지만 역시라고 할지, 타디스는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더군요. '그녀'는 당신의 마지막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열심이었죠. 자신이 죽어가는 것은 괘념치 않아 했어요.

    그래서 나는 타디스에서 나가기로 마음먹었죠. 나와 그녀는 더는 닥터, 당신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락했던 내부가 너무 황량하고 무섭게 느껴졌거든요. 폐쇄공포증에 걸릴 것 같았죠. 그녀는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버릴 준비를 조용히, 그렇지만 신속하게 해나가고 있었어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본 건 무덤이었어요. 불이 전부 꺼진 타디스 내부는 그 여느 때보다 차갑고 좁게 느껴졌죠. 그제야 내가 그녀의 마지막 탑승자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어요. 그래서 더 미련을 갖지 않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늙은 암컷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그녀가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편히 가도록 무리의 다른 코끼리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처럼요.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어서 훌쩍이면서 문을 열었고, 그런 상태에서 미키를 봤어요. 왜 이렇게 금방 돌아왔냐고 묻는 미키의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이 그리워졌습니다. 미키와 보냈던 세월이 아니라 닥터와 함께했던 첫 번째 모험이 떠오르더군요. 닥터도 기억하죠? 런던아이를 송신기로 썼던 플라스틱 괴물이요. 닥터가 화낼 게 뻔하니까 외계인이라고 고쳐두죠. 그 플라스틱 외계인.
    이렇게 근황을 털어놓고 있으려니 닥터가 있는 곳은 지금쯤 상황이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달렉은 막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잭이 나를 찾고 있지는 않은지. 솔직히 지금 제일 궁금한 건 어떻게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달렉을 막겠다는 작전에 내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는지예요.

    우리 솔직해져요. 사실 닥터가 거짓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요? 나는 닥터가 거짓말을 할 때 광대뼈 근처 피부가 떨리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고 자만했나 봐요. 왜냐면 닥터가 나를  타디스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닥터의 얼굴 근육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이라고 믿었거든요.

    아,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닥터가 한 번도 눈가 주름을 만들지 않거나 환하게 웃지 않거나 코를 실룩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걸.
    더 일찍 깨달았다면 내가 뭔갈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뒤늦은 후회에 잠깁니다.

    후회는 언제나 늦죠. 늦고, 또 늦어요. 그 사람한테 더 잘할걸.말을 더 잘 들을걸. 더 착한 아이여야 했는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들죠. 이런 생각을 입 밖에 꺼내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말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내 잘못처럼 느껴질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도 지금과 꼭 같은 감정을 느꼈는데, 아직도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끌려가지 않으려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으킨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히고 맙니다. 그리고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리죠.

    이런. 미키가 날 꾀어내지 못하니까 이번엔 엄마가 왔어요.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하네요. 밖에 나가봤자 기분이 나아질 리는 정말 요만큼도 없는데.

    이따가 봐요.


    2000년대의 어느 날. 날씨 좋음. 조금 희망을 되찾음.

    왔어요. 이따가 보자고 한 것치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네요. 말을 한마디도 안 했더니 둘이 닥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는지 내가 닥터 생각을 조금도 못 하게 단단히 감시하더라고요. 며칠 동안 멀쩡한 척을 했더니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이어서 씁니다.

    일주일 전 엄마와 미키가 나를 데려간 곳은 내가 좋아하던 식당이었어요. 누구 아이디어였는진 몰라도 떠들면서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글쎄요. 아끼던 가방을 잃어버렸다거나 누군가와 안 좋게 끝난(그랬다면 미키와 겸상하진 않았겠지만) 일이었다면 확실히 기분전환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시시한 일을 닥터가 희생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둘은 내 생각도 모른 채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잔뜩 시켰습니다. 샐러드, 피자, 스튜……. 그러고는 내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읊기 시작했어요. 나는 둘이 하는 이야기를 한참 만에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닥터와 했던 모험 때문에 내 사고 회로가 ‘우주적’으로 맞춰져 있어서 그런 시시콜콜한 ‘지구’ 얘기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죠.

    결국 나는 엄마와 미키의 시간을 더 빼앗기 싫어서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죠. 이제 그런 틀에 박힌 일상에는 흥미를 느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결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고.

    미키와 엄마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을 때 속으로 말을 좀 조심히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전에 적은 것처럼 후회는 항상 뒤늦어요.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나는 너무 괴로워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간 속을 가득 채웠던 말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밖으로 쉴 새 없이 쏟아졌고, 말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 속이 비는 게 훨씬 빨랐어요.

    네. 결국 나는 할 말을 끝까지 다 했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을 둘이 듣고 수용해줘야 할 의무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데도.

    나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습니다. 주변에선 다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엄마와 미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죠. 나는 그들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화난 건지, 아니면 이기적인 내 자신에게 실망한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가게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거리에서 날 지나친 사람들은 죄다 날 이상하게 봤을 것이 분명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마음 가는 대로 달렸으니까요. 내가 어떤 꼴이었을지 정말 상상이 가질 않네요. 뛰면서 거울을 볼 수 있었다면 웃다가 제 풀에 지쳐 쓰러졌을지도요.

    어쨌든 나는 계속 달렸어요.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요. 그러다가 숨쉬기 힘들어질 때쯤 되어서야 어느 공터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집 근처 공원이군요. 습관이란 무서운 거더라고요. 분명 도망치려고 했는데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다니.

    왜 이리로 왔을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미키가 옆자리에 앉았어요. 언제나 그렇듯 날 금방 찾아낸 거였죠. 내가 슬플 때 뭘 하고 기쁠 때 뭘 하는지 꿰뚫어 보던 애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닥터를 제외하고 내가 어디에 숨을지 척하면 척하고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우주를 통틀어 미키뿐일 테니까요. 엄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는 내가 대충 숨어도 내가 어디에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어디에 있을지 예상해 보라고 하면 분명 틀린 곳을 짚겠죠. 엄마는 도망이란 걸 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나를 쫓아온 미키는 나에게 닥터만 보고 살 거냐고 물었어요. 내 대답이 뭔지는 뻔하죠? 맞아요. 내 인생의 시점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잖아요. 나는 닥터를 잊을 수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못할 거고, 잊지 않으려 노력할 거예요. 설령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하더라도.
    미키는 당연히 당신을 향한 내 ‘충성심’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도 당신과 함께 모험했고 그 과정에서 무언갈 배웠지만, 일상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진 못했어요. 여전히 현실이 그를 강하게 얽매고 있었거든요.

    미키는 날 열심히 설득하려고 했어요. 만약 내가 돌아만 와준다면 자기는 닥터가 그런 것처럼 버리지 않겠다고 애원했죠. 자기랑 함께하면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도 했어요. 허황된 모험을 하느라 현실 감각이 어긋난 내가 다시 사회에 섞여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는 지구를 영영 떠나버리는 것 같은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요.

    이제 감이 좀 와요? 미키는 내게 평생을 함께 하자고 프로포즈한 거였어요. 상황이 꽤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나는 그러겠다고 할뻔했죠. 바닥에 커다랗게 쓰인 <Bad Wolf>를 보지 못했다면 분명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바로 거기에,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존재하는 그 단어를 본 순간 나는 미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아요. 노랗고 하얀 스프레이 자국에서 나만이 특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게요.

    미키는 오래전부터 있는 낙서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서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화장실의 빨간 벽돌벽에도 같은 단어가 적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하겠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Bad Wolf를 전혀 좋지 않은 징조로 받아들이기에 바빴죠.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나쁜 늑대가 되는데, 나쁜 건 그대로 나쁘다는 거고, 늑대도 보통 좋은 의미로 쓰이는 상징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구에서 우연한 순간에 두 번이나 그 단어 조합을 마주하자 지금껏 우리가 해왔던 추측이 틀렸다는 느낌이 왔어요. 우리가 갔던 모든 시공간에 은밀히 흩뿌려져 있던 단어가 전부 나쁜 의미일 순 없어요. 그렇다면 전 우주가 우리를 저주한단 뜻인데, 그보다는 전 우주가 우리를 반긴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요.

    그래서 나는 <Bad Wolf>에 무언가 힌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타디스를 타고 이 단어를 따라가면 닥터가 있을 게 분명하다고요.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직접 그녀를 조종해야 하는데, 내가 닥터가 아닌 한은 그녀의 심장을 열어서 내 뜻을 전하고 그녀를 설득하는 난관이 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나는 열정적으로 내 계획을 미키에게 전했습니다. 미키는 나를 무언가에 쓰인 사람처럼 보긴 했지만, 자동차를 끌고 와서 타디스의 심장을 여는 일을 도왔어요. 어, 사실 미키의 차로는 잘 안 됐지만, 그래도 고마워해야겠죠. 제멋대로인 나를 매번 도우려고 하는 그의 심성에요.
    닥터는 제게 이렇게 묻겠죠. 실패했는데도 왜 유난히 밝아 보인다고요. 뜻밖의 지원군이 나타났거든요. 바로 저희 엄마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노란색 기중기(견인차라고 해야 하나?)를 몰고 왔어요. 타디스를 열려면 이런 게 필요하다면서요. 나는 엄마가 그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엄마에게 이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게 언제였더라, 하고 기억을 되짚어 볼 정도였죠.

    지금은 타디스의 조종기 근처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심장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말이죠. 타디스는 제 심장을 내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내가 누군가요? 어떻게 해서든 꼭 열고 말 거예요.

    ……반드시.


    업데이트할 사항이 있어서 바로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어요. 끼긱끼긱 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

    세상에! 심장이 열리는 소리잖아!

    저번에 닥터가 보지 말라고 했던 시간의 볼텍스가 보여요! 심장 틈새로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어요!

    어쩜 저렇게 영롱한 색이 다 있을까!

    그 아름다운 빛깔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요. 종이를 쳐다볼 수가 없어서 지금 글씨가 어떻게 써지는지 모르겠네요. 닥터가 진짜 이 편지를 읽을 일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군요. 내 손으로 쓰고 있는데도 흘끗 봤을 땐 뭘 쓴 건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거든요. 부끄러움을 면해서 정말 다행인 일이죠.

    하여튼 지금 시간의 볼텍스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에요. 그 엄청난 색깔이 뿜어내는 빛이 저를 덮쳐 오고, 아,  빛이 제게 닿아요! 닿고 있어요! 이런 아름다움이라니! 더 빨리 그 빛에 다가가서 하나가……

    어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더라……

    아, 미안해요. 닥터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었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종이에 펜이 닿는 감각을 느낄 수가 없어서 자꾸 잊게 되네요. 타디스가 텔레파시로 나를 부르는 기묘한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그만. 그렇지만 닥터가 이 편지를 읽을 일은 없고, 순전히 내 마음의 짐을 덜려고 하는 짓이니까 그만 써도 되지 않겠냐고 타디스가 물어봐요. 그 의견에 동의하게 되네요. 아직 닥터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넘치도록 있지만 …… 뭐? 닥터를 보러 가서 직접 말하면 되지 않겠냐고?


    “로즈? 로즈, 얘야!”

    허겁지겁 타디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재키 타일러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앞으로 걸어가는 딸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영문 모를 기계의 엔진룸 후드가 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변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 눈이 아플 정도로 눈 부신 빛을 향해 직진하기 시작한 로즈는 엄마의 목소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즈!”

    재키는 온몸으로 딸이 또다시 그녀가 모르는 위험으로 향하는 것을 제지했으나 로즈는 한 발짝도 멈추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로즈를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던 재키는 결국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그녀를 돕던 미키는 조금 더 버텼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손에는 구깃구깃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타디스의 말이 옳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직접 하는 게 속이 시원하겠죠.

    이제 그녀에게 닿기까지 정말 몇 발자국 안 남았어요. 그녀가 내뿜는 빛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지만, 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세상에. 반짝이는 그 형태라니. 세상에 완벽함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겠죠.

    이제 나와 타디스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어요. 나는 타디스의 말을 듣고 타디스는 내 말을 듣죠. 우리는 이제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곧 수만 개로 쪼개지리라는 것도요. 그래야 우리가 광활한 우주와 셀 수 없이 펼쳐진 평행세계에 전부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닥터,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가요. 나는… …

    <Bad Wolf>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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